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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일기


앞집 남자
애린  2005-01-28 14:51:52, 조회 : 3,145, 추천 : 428




겨울방학이 끝난 아이들이 등교를 하기 위해 현관문을 연 순간, 맞은편 현관문을 잠그던 아저씨가 불현듯 “굿 모닝!”하고 인사를 해왔다. 그런데 나는 이 갑작스런 인사를 하마터면 알아듣지 못할 뻔 했다.

두 달 전, 오랫동안 비어있던 우리앞집에 드디어 새로운 세입자가 생겼다. 이 건물에 있는 여러 채의 아파트를 여러 자식들 명의로 이전을 해 두고 세를 받아 먹는 베트남 할머니가 있는데, 바로 우리앞집이 여러 채중 한 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들어오는 세입자마다 갖은 꼬투리로 결국 세입자가 만기일을 채우지 못하게 하는 악덕업자로 혹평이 나있었다. 그런 내막 때문에 그 할머니 집만 유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나의 이웃은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서양 아저씨와,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베트남 여자였다. 그런데 우리식구는 방음장치가 미약한 건물 덕에 그들이 이사를 온지 이틀 만에 엄청난 공포의 밤을 치르고 말았다.

느닷없는 소음에 놀라 깨어보니 볼륨을 높인 음악에 맞춰 남자는 공포 영화의 음향과 거의 흡사한 저음으로 했던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무엇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여자 비명소리는 꼭 유리창 깨지는 소리같이 날카롭고 다급했다. 그 밤 내내 남자의 반복된 말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한번만 더 말해봐” 였고, 여자는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해.” 였다.

그 후로 우리 앞집 남자는 갖은 추측을 불러 일으키며 집안에만 갇혀서 얼마나 많은 술과 담배로 하루를 보내는지 현관문 밖에까지 그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두 번 째 사건은 저물 무렵 귀가한 여자를 문전박대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리던 여자는 결국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십 여분 만에 잠시 밖으로 나온 앞집 남자가 술병 하나를 복도 난간에다 버렸는데, 그 술병이 하필 1층 유리지붕 한쪽을 깨트려 버린 것이었다. 그 유리지붕은 직사각형으로 비워진 아파트 내부 1층에만 가득 씌워 있어서 나머지 13층까지는 디귿 자로 이어진 복도에서 그 지붕 위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유리지붕이 깨지자마자 금세 우리 집 앞은 경비원들과 놀란 이웃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 간 큰 이 남자는 그런것에 아랑곳 않고 밤 늦게까지 요지부동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뒷날 아침엔 여자의 옷가지와 신발, 그 남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찢겨진 채 현관문 앞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마침내 공안이 들이닥치고 주인이 찾아와서야 문을 연 이 아저씨의 대답은 “그녀는 나 말고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도 내게 접근해 거짓 사랑을 했다, 지금 난 그 배신감에 그녀를 죽이고 싶다.”였다

그때, 그 사실을 안 사람들은 이 남자의 소행을 잠시 이해하며 모든 비난은 거의 그녀에게만 쏠려 있었을 거다. 그리고 뒷일을 전혀 예상 못한 우리는 적어도 측은하기까지 한 그 남자가 이제는 더 이상 화나는 날이 없기를 바랬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밤중에 울리던 우리 집 초인종 소리 때문에 나는 이 남자의 실체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말았다.

한밤중에 난 초인종 소리는 어여쁜 한 아가씨가 그 남자 집으로 착각하고 우리 집 벨을 눌러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 틈으로 세상에도 없는 연인,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꿈인 듯 지켜 보게 되었다.

그 후로도 그 집은 여전히 문이 꼭꼭 닫혀 있었고, 가끔 새로운 여인이 찾아오거나 역한 냄새가 진동한 걸로 그 남자가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는 걸 감지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달 만에 그를 닮은 세입자를 둔 악덕 주인은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려 주었다.

앞집 남자가 떠난 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잔잔한 일상이 한 달 정도 이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이웃이 생겨난 것이었다. 뒷모습이 영락없이 그 전 남자 같았으나 그 집 앞의 역한 냄새는 다시 찾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 아저씨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외출을 하고 귀가를 한다는 거다. 아마도 독신 아니면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가장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만에 우리는 마주쳤고 드디어 오늘아침 첫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 참에 악덕업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우리 앞집 주인은 그만 그것을 과감히 때어버렸으면 좋겠다.

내일아침 혹시라도 앞집 남자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내가 먼저 “굿 모닝”하고 인사를 해 보리라.


Celestial Dancer - Alice Gom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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