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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일기


회상 (웃서고지 오르는 길)
애린  2008-01-30 01:10:30, 조회 : 3,247, 추천 : 488



    웃서고지 오르는 길.



    서녘을 향해있는 우리 섬 ‘서고지’는 아랫동네 평지 주변을 빼곤 모두 웃서고지라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웃서고지보다 아랫서고지를 더 많이 알아주는 것 같았고,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평지와 다름없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웃서고지를 오르기 위한  첫 관문은 계단인데, 그 계단이 그렇게 가파르고 높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야 알았다.

    늙은 자밤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 으슥한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약간 가파른 곳에 웃서고지 첫 샘이 있는데, 어릴 적엔 그곳에서 귀신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그 길 따라 오르는 것이 여간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귀신을 만났다거나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샘을 지나면 동백나무 울타리를 앞에 두고 양철지붕이 있는 내 친구 집 돌담이 있었다. 그 친구엄마는 여름 내내 색색의 채송화를 어찌나 잘 키워 냈던지, 그 집 담을 스치는 동네사람들의 눈길은 항상 거기에 머물다 가곤 했었다.  이른 아침 채송화를 보노라면 그늘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밝아진다. 그래서 나는 누추한 것은 옹색해진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 집 돌담을 휘어 돌아 다시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보면 또 다른 친구네 집으로  향하는 작은 샛길이 있고, 그 샛길이 끝나는 곳엔 키 큰 돌배나무가 있었다. 듬성듬성 피었던 하얀 배꽃이 봄바람에 날리면 배추 흰 나비의 가녀린 날개 짓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그 친구네 집 돌담은 어느 성벽같이 길어 그 길이 아니더라도 곧장 돌계단만 따라 올라도 푸른 담쟁이에 가린 돌담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의 끝 무렵엔 수양버들 늘어진 울 엄마의 아담한 텃밭이 있다. 그 텃밭에 있던 집이 허물어지기전 나는 엄마랑 단 둘이서 그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 집은 더 이상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참 많았다.  

    내 작은 소망이 이루어 졌더라면 나는 엄마의 급한 성격이 싫어서 자주 외로웠을 것이고, 엄마는 내 고집이 미워서 자주 울었을 것이다. 그런들 또 어땠으랴. 사람 내 나는 풍경이란 가끔은 보이지 않은 구석까지 드러내며 한바탕 웃어 보는 게 아닐까...

    두해 전 엄마는 그 밭에서 뽑은 콩 나무를 엄마네 옥상으로 옮겨와 행여 알곡들이 튀어 나깔까 조심스레 털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소낙비가 때마침 부는 바람과 합세해 엄마의 옥상으로 진입해 왔던 것이다. 엄마는 허둥지둥 콩나무 위에 비닐을 씌우며 알곡들이 비에 젖을까 몹시도 걱정을 하셨다. 그때서야 나는 한 알의 콩에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은 엄마의 알토랑 같은 사랑의 알곡들을 만날 수 없음에 아파하고 있다.

    이윽고 그 집터가 끝나는 부분에 이르면 마침내 계단도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섬의 중간을 관통하는 오솔길과 그 길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마삭줄 담을 만날 수 있다. 그 넝쿨의 성장속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던 것 같다. 그 집 주인이 아무리 잘라내도 마삭줄은 자주 담을 넘나들며 이탈을 꿈꾸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면 유난히 붉은 잎이 꽃인 냥 섞여있는 마삭줄이 세상을 향해 늘어져 있을 것이다.





    그 담을 지나 다시 오솔길을 걸으면 작은 솔밭을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망산을 보고 있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들기도 했다.
    내 사춘기 시절 내 사촌 언니의 아홉 살 박이 둘째 딸애가 그곳에서 달려오면 나는 캔디라는 만화를 연상하기도 했다. 그 애가 뛰어오는 모습이나 웃는 모습은 정말 캔디같이 슬프면서도 맑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그 길 따라 걷다가 이윽고 강씨네 집에 이르면 어느새 길은 할미꽃처럼 허리를 굽는다. 그  길 따라  나도 허리를 굽으면 볼 수 있는 풀꽃들이 참 많았다. 남색 달개비며 하얀 별꽃이며...그리고 그 어디 쯤 자줏빛 칡꽃에서 나는 향내는 알맞게 가미한 가을바람에 더욱 싱그러운 맛을 우려내곤 했었다. 그 맛을 음미하며 발아래 펼쳐진 옥빛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달콤한 비밀이고 여유였다.

    그런 내 서정을 지나 다시 언덕길을 오르면 개구리 울음 낭자하던 칠공주네 다랑논이 있고 그 언덕 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 할머니 남새밭이 있다. 그리고 그 밭을 내려다보며 걷다보면 웃 서고지의 마지막 샘이 나온다.





    어린 날, 부모님은 어떤 사정으로 나와 오빠를 할머니 집에 남겨두고 뭍으로 떠나셨다. 그런 엄마가 잠시 다니러 오셨는데 나는 그 샘가에서 엄마께 한참 동안 여쭈던 말을 다시 여쭈며 때마침 앞섬으로 지고 있던 붉은 노을을 보았다.

    “엄마, 이제는 언제와?”
    “내일, 모레, 꼬패(글피)...”
    “그때 꼭 오는 거지?”
    “그럼 오고말고...”
    그러나 나는 그때 그 날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물음에는 내일 ,모레, 꼬패가 있고
    그 꼬패(글피)라는 날은 내 가까이 올 것 같지 않은 노을처럼 내가 찾으면 슬퍼지고 내가 외면하면 떠나버릴 것 같은 형상으로 내 가슴을 자주 무너뜨리곤 했다.
    그리고 어린 내가 그때 했던 말이나 모습이 엄마의 가슴에 슬픈 별이 된 줄 먼 훗날에서야 나는 비로소 알았다.





    넓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할머니 집 새랍을 통해 들어와, 황토마당과 친구네 집 감나무가 내려다보는 뒤란으로 통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햇볕 받아  빛나는 남쪽 언덕의 풀잎들을 찰랑찰랑 건들며 지나가곤 했다.

    나는 할머니 집 마루에 앉아 꿈결처럼 몽롱한 눈길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지금 내 어린 날 보았던 그리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싶고, 그것들을 좋아하는 어느 맑은 영혼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글,사진/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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