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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과 감꽃
섬그늘님 글  2004-06-28 10:51:27, 조회 : 1,741, 추천 : 351




대숲에서 쏴아아...
댓잎이 부딪히는 바람소리에 취합니다.
다른 어떤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
재래식 변소 때문에 겪는 고초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더라도,
이곳을 사랑하리라 다짐을 하였지요.
단지 마을에 목욕탕이 없어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장날이면 하얀 밀가루를 흩뿌린듯한 먼지를 뒤로 한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알 듯 모를 듯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쑥스러워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웃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저 새사람이 도가집 며느리인가베"
"하이고...색태가 우찌 저리도 곱노"
간간히 힐끗힐끗 저를 쳐다보면서
수근수근 잘도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주고 받습니다.
이제 막 조선소가 생겨 젊은이는 모두 나가고 없는 이곳에
도시에서 촌으로 시집을 왔다는 사실 하나로
저는 충분한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미장원에서 손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뽀골뽀골한 파마를 해줍니다.
실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이없어도 어쩌지를 못합니다.
장날이면 목욕탕도 만원입니다.

아우슈비츠 개스실 같은 숨막히는 곳에서
전쟁같은 목욕을 끝내고,
벌건 얼굴로 이리저리 장구경을 합니다.
손바닥만한 서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오랜만에 책냄새를 맡으며 어정거려 보기도 합니다.
우체국에서 친정어머니께 시외전화 신청을 해 놓고
순번을 기다립니다.
엄마도 담을 이웃하며 함께 살자던 언니도
보고 싶습니다.

연결이 잘 안되는지 도통 번호를 불려주지 않습니다.
저녁 밥때가 되기전에 집으로 가야 하는데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다 그냥 나오기도 했었지요.

어머님께서 적어주신 반찬거리는 신경을 써서 사야 합니다.
제가 뭘 압니까
그런데 우체국에서 만나기로한 김씨 아재와 중리아지매는
약속시간이 되어도 오질 않아 애간장이 탑니다
다른 식구들이 부탁한 약이며, 간식거리며 반찬거리며
짐이 한보따리입니다.

장날 난장에서 촌스럽고 질은 떨어지지만
곰탁곰탁 다니며 물건을 사는 색다른 재미도 있답니다.
그때 산 나무 필통을 볼 때마다 아련한 추억으로 데려다 줍니다.
길다란 직사각형에 뚜껑은 밀고 당기도록 되어 있으며
짙은 초록색으로 힘이 느껴지는
대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운치(?)있는 필통이지요
국민학교때 보았던 그런 필통이 아직까지 보이기에
덥썩 사고 말았습니다..

집안일이 아연해질 때,
마음이 비 새는 집처럼 허술하게 느껴질 때 ,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의 공기를 바꿀 필요를 느낄쯤이면
누구와 따뜻한 소통은 없어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오는 장날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신행을 온 뒷날, 집안 식구들과 첫인사를 나누니
식구가 열두명이었습니다.
팔순이신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고모부님, 당숙부님, 남편, 시동생,
공장에서 일하시는 아재 3분,
중리아지매, 저 새댁..... 우리집에서 삐대는 시간이
더 많은 큰고모님과 당숙모님까지
하루 세끼 만들어 먹고, 씻고, 치우면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게다가 시아버님의 친구 분들은 수시로 우리 집에서
눌러 살았습니다 .
술상은 밤이고 낮이고 짬이 없었지요
새아기는 아랫채 윗채를 다리가 아프도록
오르락 내리락 해야만 합니다.

"요새 같은 시상에 이런 촌에서 살라꼬 맴묵는게 어데
시븐일이 아닐낀데
성님은 새아가를 정말 잘 보셨소"
"새아가 니 덕분에 요새 우리 대접이 좋~다..
이전에는 너거 시어마씨 눈치 보느라
어푼 가야지 오래 앉아 있었다가는 궁물도 없었다 아이가
하하하하......"

막걸리라도 떨어지면 갈텐데....
이거는 웬...도가집에서 있는 게 막걸리이니
그만 간다 하고 나서면 문 앞에서 다른 사람 만나
다시 들어와 또 한잔,

지나 가다가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그냥 지나치지 못해
선 자리에서 한 잔,두 잔, 릴레이로 사람들이 바뀌고
또 목청들은 얼마나 큰지...
어둠이 내리고 그래도 아니가고 콩팔쥐팔하고 있으면 어머님이

"인자 그만 들어 가소
우리 새애기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
고함을 한번 내치면
금세 사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자식을 유난스럽게 사랑하는 통 큰 여장부이시랍니다.

늦은 밤 ,
너무나 초롱초롱하여 서러운 별들의 이불을 덮고는
초여름 맑은 바람을 타고 온 몸을 휘감는 치자꽃 향기에
숨죽여 울 일도 많습니다.


온갖 꽃들이 제 몸을 뚫고 나와 눈이 부십니다.
꽃나무를 돌아 볼,쳐다 볼 시간도 나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어도 꽃나무들은 제 할 일들은 어김없이 잘 하더군요
꽃 피울 때 꽃 피우고, 질 때가 되면 말없이 숨어
다른 꽃이 필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합니다.

어느새 비밀의 화원엔 비릿한 감꽃이 수없이 내려 앉아
열심히 또 비질을 해야만 합니다.
이제는 키가 큰 대빗자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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