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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이 아름다운 압록역

산적두목

2011-04-11 18:36:50, 조회 : 3,056, 추천 : 652

누가 “추억을 관통하여 거슬러 오르는 모든 길은 아름답다.”라고 했던가? 지난해 ‘위대한 유산’에 이어 올해는 ‘간이역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꾸려가기로 했다. “간이역은 이용객이 적고 효율성이 낮아 역장이 배치되지 않고 일반 역보다 규모가 작은 역을 말한다. 간이역의 역장은 인근 보통 역의 역장이 겸임하여 운영한다. 그러나 간혹 역장이 있는 보통 역이라도 간이역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찾아간 간이역으로는 섬진강 변에 자리한 압록역이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의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압록까지 순자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러와 보성강과 만난다. 순자강은 모래가 많고 보성강은 자갈이 많은데, 두 물줄기가 만나 섬진강이 되면서 생긴 드넓은 백사장이 있어 유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여름에는 모기가 없어 가족단위 피서지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강을 가로질러 반월교와 철교가 놓여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다. 보성강 물줄기가 이곳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압록은 합수머리 혹은 두물머리가 된다. 따라서 마을 이름은 원래 두 강의 푸른 물이 합류한다는 뜻의 합록이었다. 그 후 오리과의 철새들이 많이 날아든다고 해서 ‘합’자를 오리 ‘압’자로 고쳐 오늘의 압록이 되었다.

압록역은 곡성역과 구례구역 사이에 있는 작은 역으로 전라선의 여러 역 가운데 섬진강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역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지만, 예전의 역사가 있을 적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역"이라 불릴 만큼 운치 있는 역이었다. 또 산과 강, 철길과 도로가 내내 이웃해 달리는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인 섬진강 백리 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본디 전라선은 구불구불한 섬진강을 따라 열차가 다니던 선로였다. 그러나 기찻길을 새로 내면서 강변을 왼편에 끼고 나 있던 선로들은 직선화되고 복선화되면서 부득이 강가가 아닌 산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압록역 부근에서만 강가로 선로가 나 있어 겨우 섬진강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압록역에서 드라마 ‘모래시계’가 촬영되었다. 최민수의 어머니였던 김영애 씨가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 장면이다. 그래서 정동진에 고현정 소나무가 있다면 압록역에는 김영애 소나무가 있다. 역 안에 있는 소나무가 ‘김영애 소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도 사연이 있다. 드라마에 나왔던 소나무는 전라선 개량공사를 하면서 역사와 선로를 이전하다가 고사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소나무가 김영애 소나무 구실을 하고 있다.

압록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강산이 3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친구가 군대를 가야 했다. 그래서 위로 여행을 겸해 남원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남원에 들러 광한루를 구경하고 여수를 향하던 길이었다. 섬진강변을 따라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강변에 쌓인 모래톱이 그리는 곡선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그때의 아름다웠던 기억은 압록이라는 지명과 함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리곤 언젠가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 또한 쉽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자리에 섰다. 하지만, 그 많던 모래는 흔적도 없다. 오죽하면 강수욕장으로 불릴 만큼 모래사장이 좋았는데 말이다.

어렵게 찾아간 압록역은 문마다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고 출입금지라는 팻말만 스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역사를 돌아보고 역 앞 어디에나 있을법한 막걸리 집을 찾았다. 예상대로 간판이 걸려 있어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간판은 그냥 허울일 뿐이고 장사를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단지 간판을 철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허전한 맘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집 앞 공터에서 냉이와 돌나물을 캐고 있던 할머니가 보였다. 압록에서 가까운 고달면 가정리에서 열일곱에 시집을 오셨다는 김금옥 할머니였다. 오십 년 넘게 기찻길 옆에서 살아온 터라 압록에 대해 잘 알고 계셨다.

“옛날에는 요 앞에 은어랑 황어랑 대사리가 엄청 많이 났어요. 근디 언젠가부터 그것들이 싹 없어졌어요. 말로는 하동 어디에다 둑을 막아서 그랬다는디 모르겠어요. 압록역만 해도 한 40년을 기차를 타고 곡성 오일장에도 가고, 아이들은 곡성중학교로 통학을 했는디 기차가 서지 않은께 불편허요. 아쉽기도 하고요. 하기사 압록분교도 아이들이 없어서 폐교가 될 정도로 젊은 사람이 없는디 기차 탈 사람이 어디 있것오. 다 이녁 차로 댕기제”

“어르신 제 기억으로는 옛날에는 기차역이 운치가 있고, 강변에 모래도 많았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입니까?” “맞아요. 전에 기차역은 기와로 지었는디 참 이뻤어요. 근디 철길 넓힌다고 싹 허물어 버리고 지금은 새로 지어 놓고도 비어 있으니 안타깝지요. 젊은 사람들은 다 얘기허요. 옛날에 그 소나무만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디 하고요. 이따가 저 위로 가보면 알것지만 작년에 강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큰물이 졌어요. 그때 큰 다리 하나가 떠내려 갔어요. 그랬으니 모래가 남아 있것오.”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옛 기억을 더듬으며 곡성으로 향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가정리에 다다르니 떠내려 갔다던 다리는 교각만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옆이 레일바이크 종착점이다.

아름다웠던 섬진강변의 옛길, 곡성역과 압록역 구간은 섬진강 기차관광사업으로 개발이 되었다. 기차마을이 있고 레일바이크를 비롯해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고 있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또한,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이 1700년 전에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에 실존인물로 밝혀져 심청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삼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압록역, 이제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이도 없으니 더 이상 이별은 없다. 오늘도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건만 옛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안타까워 말일이다. 옛길에는 무궁화호 비둘기호 대신 철로자전거와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있으니, 누군가의 추억 속에는 지금의 모습이 기억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지난날 마주했던 그 강물은 지금은 어디에 흐르고 있으려나 태평양 아니면 대서양 어디쯤에……